냉기에 손끝을 물리면 그 자리가 찌르르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처럼 꼭 한뼘의 간격을 두고 아려온다. 나의 한뼘과 너의 한뼘이 얼마나 다른지는 너와 나를 우리로 부르던 시절에도 알지 못하였다 유난한 숫자 아래서만 냉기가 냉기로서 불리우던가 오로지 내게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있다. 유난한 숫자 아래의 우산 아래의 우중雨中의 네가
당신은 독에도 죽지 않으니 우리는 같은 독배를 나눠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음이 낭만적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나 어도러블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어쩌다 초대받은 자리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든 생각이지만, 연극이 어도러블의 삶에 크나큰 감명을 주지도 않았으니 '문득'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죽음과 사랑이 어도러블...
아나벨라는 눈물 대신 말을 토한다.* 고통을 나누기엔 상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성을 사랑해본 기억은 없으나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님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사랑을 여섯 가지 종류로 분류했던 것에 따르자면 아마 형제, 혹은 가족애에 해당할 사랑과 가장 가깝겠지. 그는 알에서 갓 깨어난 작은 새처럼 처음 돌본 이를 따랐다. ...
유진의 머리 위로 이른 여름 해가 무심히 쏟아졌다. 배려 없이 난폭한 햇살 아래에 그늘진 얼굴은 이렇다 할 표정을 짓진 않았으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침울한 인상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진한 음영이 진 얼굴. 그리고 꼭 그만큼의 절망. 유진은 가끔 토해낼 길 없는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할지 고민하곤 했으나 단 한번도 답을 도출해 낸 적은 없었다. 그는 ...
0. 사각사각, 적막한 방 안에서는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소리 외에는 숨소리가 그들 사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시는 어쩐 일인지 입을 다물고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모양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눈에 들어간다는 치치의 말에 눈을 감아버린 지 오래였고, 치치는 한참 머리칼을 다듬는 일에 열중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은 루시는 문득 머리칼...
그 애는 정말 환하게 웃었어. 그 이름의 유래가 된 노래에 등장하는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났단다. 굳이 보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루시라는 이름의 별도 그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 가치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야. 루시의 웃음은 그것처럼 희귀하진 않았으니까. 왜, 보석과 광물이라고 한다면 귀할수록 그 가치가 상승하잖니. 루시가 자주 웃는다고 ...
요새 들어 희는 답지 않게 단호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제게 들어오는 약속과 관계를 에둘러 전부 거절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차이성이 아느냐 모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 하나로는 결과가 달라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그에게 있었으나 그에게 없기도 하고, 때에 따라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0.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내가 그 과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랑을 되살려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리고 도저히 그를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북한 애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옛정인...
나는 언어 속에 고립되어 간다 모두가 말과 말 사이를 건너 여행하고 있는데 나는 문자와 문자 사이를 뛰어넘는 것이 두려웠는데 타인의 말은 오색찬란한 오로라를 닮았는데 내 것은 흑백의 모노톤을 벗어나지 못하고 값싼 흑백 텔레비전에 나오는 우스운 광대마냥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불거리는 사람들 가장 고조된 순간에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법을 알고 있어요 종착...
여름의 햇살이 비뚜름하게 창을 가로질렀다. 유진은 습관처럼 찻잔을 하나 꺼내려다가, 찬장에서 그와 세트인 잔을 하나 더 꺼냈다. 손님이 있었지. 이렇게나 조용한 손님은 오랜만이라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깜빡 존재를 잊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수현 씨." 유진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손님의 앞에 차를 내려놓는다. 오후 두시면 그러하듯 블라인...
이수현은 서재의라는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더라면 이런 동맹 역시 제안하지 않았을 테지. 그의 직감은 서재의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렸으나, 직감만 믿고 살아남기엔 만만치 않은 것이 그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 앞에 서면 어느 순간에는 시니컬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다정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순간 약자로 못 박히...
처음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김이형과 한서애는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적어도 한서애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와 자신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하나가 우리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결론적으로 그 생각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겨우 이십 년도 채 살지 않아놓고는 삶이 외롭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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